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우리는 대체로 좋았던 날로 갑니다. 첫사랑을 만나던 봄, 아무 걱정 없던 스무 살 같은 곳으로요. 그런데 이 소설의 버스는 조금 다릅니다. 주인공을 가장 도망치고 싶었던 시간으로도 데려다 놓습니다.
리치먼드힐의 이층 버스는 이경진 작가가 2026년 6월에 낸 첫 장편소설입니다. 캐나다에 살면서 승무원으로 일하고, 유튜브 채널 콜미진을 운영하는 분이 2년에 걸쳐 쓴 작품이죠. 출간되자마자 교보문고 소설 부문 주간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습니다.
혼수상태에 빠진 아들 곁을 지키던 엄마가 과거로 가는 버스를 타게 된다는 이야기. 줄거리만 들으면 익숙한 시간여행물 같은데, 읽고 나면 전혀 다른 자리에 서 있게 됩니다.
리치먼드힐의 이층 버스 줄거리 — 병원 앞에 멈춰 선 버스
캐나다 토론토 근교의 조용한 도시 리치먼드힐. 한국인 부부 민정과 철수, 그리고 아들 타미가 살고 있습니다. 비가 쏟아지던 어느 여름날 사고가 나고, 타미는 혼수상태에 빠집니다.
그날부터 민정의 하루는 병원과 집 사이를 오가는 것으로만 채워집니다. 언제 깨어날지 아무도 답해주지 못하는 상황. 할 수 있는 게 기다리는 일뿐인 나날이 이어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 앞에 이층 버스 한 대가 멈춰 섭니다. 있어서는 안 될 버스에 올라탄 민정은, 내리는 순간 스무 살의 자신이 되어 있습니다. 철수를 처음 만났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 시간을 실컷 살고 정신을 차리면, 다시 병원 앞입니다. 이후 민정은 계속해서 그 버스에 오르게 됩니다.
※ 이 글에서는 결말과 마지막 선택의 내용은 다루지 않습니다.
목차가 곧 인생의 정거장 — 아홉 개의 장 제목이 말해주는 것
이 소설을 읽기 전에 목차를 한번 훑어보시길 권합니다. 장 제목만 늘어놓아도 이야기의 지도가 그려지거든요.
| 순서 | 장 제목 |
|---|---|
| 1 | 낯선 이민자들 |
| 2 | 매그놀리아 하우스 |
| 3 | 타미의 계절 |
| 4 | 웨스턴 병원 |
| 5 | 단풍잎 그리고 이층 버스 |
| 6 | 외할아버지의 시골집 |
| 7 | 프레드 잡화점 |
| 8 | 어거스트의 지하실 |
| 9 | 다시 리치먼드힐 |
앞의 네 장은 현재입니다. 이민자로서의 삶, 집, 아이, 그리고 병원. 다섯 번째 장에서 버스가 등장하고, 그때부터 장 제목이 전부 장소로 바뀝니다. 외할아버지의 시골집, 프레드 잡화점, 어거스트의 지하실.
버스가 데려다주는 곳들이 곧 챕터가 되는 구조입니다. 그러니까 이 목차는 사실 노선도에 가깝습니다. 민정이라는 사람이 지나온 정거장의 목록인 셈이죠.
(저는 이 목차를 보고 나서야 이 소설의 형식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정거장 단위로 잘라놓으면 이런 모양이구나 싶었거든요. 그리고 그 정거장 중에 좋은 곳만 있지는 않다는 것도요.)
행복한 시절만 가지 않는 이유 — 가장 아픈 정거장에 내리다
이 소설이 흔한 시간여행물과 갈라지는 지점이 여기입니다.
버스는 민정을 철수와 사랑에 빠지던 봄으로만 데려가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피해 동네를 서성이던 어린 날로도 데려갑니다. 엄마와 함께 외할아버지 댁에 갔던 날로도요.
보통 이런 이야기에서 과거로 가는 건 보상 같은 것입니다. 힘든 현재를 견디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잠깐의 위로요. 그런데 이 버스는 위로만 주지 않습니다. 가장 도망치고 싶었던 자리에 사람을 내려놓고 문을 닫아버립니다.
왜 그래야 했을까요. 아들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좋았던 기억만 되풀이해서 보여준다면, 그건 결국 도피에 그칩니다. 민정이 다시 서 있으려면 좋았던 시간뿐 아니라 자기가 눈길을 주지 않았던 시간까지 통과해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 선택들이 쌓여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걸 받아들이는 일. 그건 잘한 선택만 세어보는 걸로는 도달할 수 없는 자리니까요.
어바웃 타임과 닮은 점, 그리고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
이 소설을 읽은 사람들이 자주 떠올리는 작품이 영화 어바웃 타임입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다른 선택을 해보지만, 결국 누군가의 죽음만큼은 막을 수 없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겹칩니다.
처음에는 운명을 바꾸는 이야기처럼 보이다가, 끝까지 읽고 나면 상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였다는 걸 알게 되는 구조도 비슷합니다.
다만 다른 점이 있습니다.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고, 자기 의지로 시간을 오갑니다. 반면 민정은 버스를 부르지 못합니다. 버스가 그녀 앞에 멈춰 설 뿐입니다. 어디로 갈지도 그녀가 정하지 않습니다.
선택할 수 있는 사람과 태워지는 사람. 같은 소재를 다루면서도 이 차이가 두 이야기의 온도를 갈라놓습니다. 아이가 병상에 누워 있는 엄마에게 통제권을 주지 않는 이 설정은, 어쩌면 그 상황을 겪어본 적 있는 사람이라야 쓸 수 있는 종류의 정직함일지도 모릅니다.
이 소설이 안 맞을 수도 있는 사람 — 솔직한 이야기
좋은 점만 말하는 건 도움이 안 될 테니 솔직하게 적어보겠습니다.
먼저 이 책은 문학적 실험이나 낯선 문장을 기대하고 읽을 책은 아닙니다. 문장이 어렵지 않고, 이야기가 친절한 편입니다. 그래서 술술 읽히지만, 반대로 곱씹을 문장을 찾는 독자에게는 다소 평이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시간여행이라는 소재 자체가 이미 많이 소비된 것도 사실입니다. 설정의 신선함으로 승부하는 소설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유튜버의 첫 소설이라는 이력이 붙어 있는 만큼, 그 화제성이 판매에 영향을 줬다는 시선도 있습니다. 이런 배경 자체가 거슬리는 독자라면 편하게 읽기 어려울 수 있겠죠.
그럼에도 이 소설이 사람들을 붙잡는 건 소재나 문장이 아니라 상황의 힘 때문으로 보입니다. 아이가 깨어나지 않는 상태로 누워 있고, 부모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 그 자리에 서본 적 있거나,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사람에게는 이 이야기가 기술적 완성도와 무관하게 가닿습니다.
다시 리치먼드힐, 그 마지막 장의 제목에 대하여
아홉 번째 장의 제목은 다시 리치먼드힐입니다.
과거의 정거장들을 다 지나온 버스가 결국 돌아오는 곳이 떠나기 전 그 자리라는 뜻입니다. 아무 데도 가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죠. 같은 장소에 돌아온 사람이 같은 사람은 아니니까요.
이 소설을 돌아가는 이야기로 기억하는 독자도 있고, 돌아오는 이야기로 기억하는 독자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후자 쪽에 가깝게 읽었습니다.
바꿀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버스에 오르는 사람의 마음. 그게 미련인지 사랑인지는 아마 끝까지 구분되지 않을 것입니다. 구분할 필요가 없는지도 모르고요.
